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문단 편집) == 특징 == 이 때부터 성화제도가 생겨서 올림픽 성화를 피우게 되었다. 다만 성화만 피웠으며, 올림피아에서 개최국까지 성화를 들고 오는 성화 봉송은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올림픽 입장 때 그리스 선수부터 입장하는 것이 이 대회를 계기로 확립되었다. 몇 달씩 늘어지는 기존 대회 운영에 참다못한 IOC가 암스테르담 대회부터 공식 규정으로 경기 일정을 최대 16일로 제한하였다. 10,000m 결승에서는 핀란드의 두 숙적 [[파보 누르미]]와 리톨라가 다시 만난다. 누르미는 리톨라를 누르고 30분 18초 8이라는 믿을 수 없는 기록으로 우승했는데, 전 대회의 우승자이자 세계 신기록 보유자인 리톨라에게는 그야말로 굴욕적 순간이었다.[* 전 대회인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누르미는 무려 5개의 금메달을 차지하며 최전성기를 구가했지만, 10,000m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누르미는 1920년대에 걸쳐 열린 3차례의 올림픽에서 연속으로 금메달을 따내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이것이 누르미가 올림픽에서 획득한 9번째이자 마지막 금메달이 되었다. 여자 육상 최초의 금메달은 100m의 엘리자베스 로빈슨(미국). 너무 긴장한 나머지 출발 신호를 어겨 실격 당한 캐나다 선수는 잔디밭에 주저앉아 30분 동안 통곡하는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 대회 삼단뛰기에서 우승한 일본의 오다 미키오(1905~1998)는 아시아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으며, 일본은 다음 LA 대회에서 금메달 7개를 따내 일약 5위로 올라서는 기염을 토하며 세계 스포츠계의 신흥 강자로 부상했다. 오다 미키오의 아시아 최초의 금메달과 더불어 아시아 최초의 단체종목 금메달도 탄생했으며, 올림픽 사각지대였던 아시아 팀들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 처음으로 올림픽 하키 경기에 출전한 인도 대표팀[* 당시 영국 식민지였지만 독립선수단 자격을 부여 받아 출전했다.]은 화려한 개인기를 앞세워 거뜬히 우승, 앞으로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이웃 파키스탄에 왕좌를 넘겨줄 때까지(어차피 파키스탄도 영국령 인도의 후신이긴 하다.) 28년 동안 6연속 제패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또한 36년 베를린 올림픽까지 3연패의 견인차 된 20세기 최고의 하키영웅 이안 찬드가 이 대회로 올림픽에 데뷔했다. 독립선수단 출격 자격을 부여 받은 인도와는 달리 이 대회에서부터 식민지 국가들의 대표팀이 다른 나라의 국기를 달고 나오는 경우가 존재했으며, 남자 마라톤에서 프랑스 지배 하에 놓여졌던 알제리 출신 부게라 엘 우아피가 프랑스 대표로 출전하여 우승하였다. 우루과이도 축구에서 2연속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 경력과 파격적인 조건으로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1회 월드컵]] 개최권을 따냈고, 거기서도 우승했다. 결승전에서 당대의 양대산맥인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과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이 맞붙었고 여기서 우루과이가 승리해서 금메달을 차지했는데 2년후 개최된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에서도 같은 결과가 났다. 1차 대전의 [[동맹국]]으로 전대회 불참 수모를 당한 독일이 참가했으나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이에 약이 오른 독일 선수들은 일부 종목에서 난투극을 벌였는데 오히려 체면만 더 깎이고 말았다. 한편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차기 대회]]의 개최국으로 예정되어 있던 미국은 철저히 이 대회를 이용해 자국의 우위를 자랑하려고 했다. 특히 미국 선수단의 단장으로 참가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올림픽을 '국력의 평가장'이라 부르며 선수들에게 비밀 훈련을 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